[시론] '잊혀질 권리' 논의 서둘러라
지난 13일 유럽사법재판소(ECJ)의 ‘잊혀질 권리’를 인정한 판결이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고 있다. ECJ는 판결문에서 인터넷 검색업체는 부적절하거나 시효가 지난 검색 결과물에 대해 해당 정보 주체의 요청에 따라 링크를 제거할 책임이 있다고 판시했다.

잊혀질 권리란 인터넷에서 생성되고 저장·유통되는 개인정보에 대해 삭제를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이는 정보 주체의 자기정보 통제권을 강화해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는 권리로, 특히 신상털기가 사회문제로 부각되는 최근 공감을 얻고 있다. 반면 잊혀질 권리는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 공익 정보에 대한 알 권리 등을 침해할 우려가 있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잊혀질 권리의 가치 충돌적 속성에 따라 각국은 잊혀질 권리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번 ECJ 판결의 영향으로 한국 사회에서도 잊혀질 권리 도입에 대한 논의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한다. 이에 앞서 해당 판결의 의미를 다시 한 번 해석하고 도입 여부와 도입 시 고려해야 할 사항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ECJ의 판결은 선언적인 내용에 그쳤던 잊혀질 권리에 대해, 권리 행사를 위한 요건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잊혀질 권리를 보장해야 할 사업자, 대상이 되는 정보의 기준, 사업자의 조치, 가치 충돌 시의 판단기준 등 구체적이고 의미있는 판단기준을 규정했다. 또 다른 주목해야 할 사항은 이 판결에서 잊혀질 권리 보장의 책임을 언론사 혹은 온라인서비스제공자가 아닌 검색업체에만 부여했다는 점이다. 즉 정보 자체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정보가 검색되는 연결고리만을 삭제하도록 한 것이다. 이는 표현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직접적으로 침해할 위험의 소지를 피한 것으로 우리 역시 대상 사업자와 표현의 자유 침해 방지 등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한국 사회에서 잊혀질 권리를 도입하려면 우선 사회적 합의와 원칙의 설정이 필요하다. 유럽연합(EU)은 2010년부터 잊혀질 권리에 대해 논의해왔으며 가치 충돌 시 공공의 이익이 우선이라는 원칙을 정한 바 있다. 한국은 아직 잊혀질 권리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으며 합의 역시 도출되지 않았다. 관련 주체들을 중심으로 사회 전반의 논의를 통해 합의를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원칙을 정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잊혀질 권리를 보장할 경우에는 이 권리를 인정하기 위한 합리적인 판단기준과 임계치 설정이 필요하다. 가치 충돌적인 문제에 대해 어떤 요소들을 바탕으로 판단하며, 어느 수준 이상일 경우 잊혀질 권리를 허용할 수 있을지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이 임계치 평가를 사업자에게 맡기는 것은 부적절할 수 있으며 지나친 부담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정부는 논의를 통해 잊혀질 권리와 관련된 기준과 임계치를 도출해 이를 공포하고 잊혀질 권리 요구 시 이를 평가하기 위한 위원회 등을 선정할 필요가 있다.

대상 사업자들이 잊혀질 권리를 이행토록 하는 제도화 역시 중요한 문제다. 구글, 페이스북 등 해외 사업자들이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타국 기업에 대한 정보통제권과 사법관할권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 글로벌 사업자들이 잊혀질 권리의 면책이 될 경우 국내 사업자에 대한 역차별이 될 수 있으며 반쪽짜리 권리로 전락할 수 있다. 따라서 잊혀질 권리가 모든 사업자들에 적용될 수 있도록 근거가 되는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

ECJ의 판결은 우리에게 잊혀질 권리 도입을 논의할 기회를 제공했다. 잊혀질 권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온전히 보장하며 역기능을 최소화하기 위해 신중한 접근과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임종인 <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장 jilim@korea.ac.kr >